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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리포트

로봇에 대한 논의, 이제는 전문적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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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보캅 개봉을 맞이해 특별한 시사회가 펼쳐졌다. 금번 시사회에는 공중파 방송으로 유명한 로보티즈의 한재권 박사와 로봇 토르가 함께한 토론회가 펼쳐져 더욱 뜻 깊은 자리가 됐다. 무엇보다도 이날 시사회에서 가장 큰 수확은, 꼬마 아이에서부터 로봇업계 원로까지, 로봇 문외한에서부터 로봇산업 정책을 기획하는 인사까지 어우러져 기존의 ‘로봇 세미나’에서는 볼 수 없었던 토론회가 펼쳐졌다는 점이다. 지난 2013년 펼쳐진 ‘인간의 또 다른 이름, 로봇 포럼’ 이후 또 한 번 재미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로봇의 대중화를 위해 꼭 필요한 판을 로보티즈가 벌이지 않았나 싶다.


지난 2014년 2월 7일 용산 CGV에서 펼쳐진 로보캅 시사회에서 한 학생이 인간이 되고자 했던 로봇, 바이센테니얼맨은 인간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무척, 기분 좋은 질문이었고, 이 질문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고민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은, 인간이 되고자 했던 바이센테니얼맨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아직도 그것을 우리의 입장에서 확정짓고, 분류하려 한다는 점이다. 

바이센테니얼맨은 인간일까요?
우리는 로보캅과, 아이언맨과, 바이센테니얼맨과, 인간이 되고자 했던 바이센테니얼맨이 엄연히 다름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사이보그도, 휴머노이드도, 안드로이드도, 자동화기계도, 웨어러블 로봇도, 로봇 의수의족도 모두 로봇으로 정의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번 시사회의 주인공이었던 로보캅은, 굳이 비유하자면 고도의 인지과학과 로봇의수나 의족과 같은 도구로서의 로봇기술 적용으로 볼 수 있겠다.
또한 아이언맨은 웨어러블 로봇으로, 화두가 된 바이센티니얼맨은 휴머노이드형 가정용 서비스로봇으로 분류할 수 있다. 

로봇이 가정에 편입되는 것은, 마치 고양이나 개를 기르는 것처럼 내 생활에 하나의 새로운 ‘종’이 생기는 것과 같다. 더불어 이 로봇이 감정을 가지고, 스스로 인간이 되고자 마음먹게 되며, 인간을 모방할 때 우리는 이 존재에 대해 인간이냐, 아니냐를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다. 그 역시 이미 정체성과 자아를 지닌 하나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마치 게이를 두고 남자냐 여자냐를 주변에서 따지고 드는 것과 같지 않은가?). 물론, 하이데거식 현존재(Dasein)로서 존재하고픈 바이센테니얼맨에게는 이 왈가왈부가 절실할지도 모를 일이다.

새로운 종으로서 사회에 편입될 로봇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질문을 했던 학생이 듣고 싶었던 대답은 아마도 “인간을 모방한 시점의 바이센테니얼맨을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폐기가 가능한 무생물체로 취급할지, 인간의 법이 적용되는 존재로 바라볼지”에 대한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물론 타자의 정의가 중요해진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처럼 바이센테니얼맨이 자아를 지니고, 자신이 인간으로 정의되길 바라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의 존재를 정의해줌으로써 그와 상호인식을 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그에게 합당한 책임과 역할을 부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어떠한 형태로든 사회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의는 지극히 가변적일 수 있으며, 그 기준이 오로지 인간일리도 만무하다.
그, 혹은 그것은 인간으로 규정될 수도 있고, 애완동물로 정의될 수도 있다. 인간이 아니지만 가족이 될 수도, 새로운 종의 사회 구성원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바이센테니얼맨 스스로가 인간이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인간을 기준으로 한다? 윤리적인 측면에서 잘못된 접근이다. 만약 그가 인간이 아닌 로봇으로 단순 규정지어진다면, 우리는 자아를 가진 그것을 쉽게 폐기할 수 있는가? 이러한 측면에서, 로봇과 인간의 관점보다는 생물과 무생물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차라리 윤리적이라고 생각된다.
한 로봇 뉴미디어 기업 대표는 이에 대해 인간이냐, 아니냐 식의 흑백의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분명히 지적했다. 

개인적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 이 애매한 대답이 오히려 명쾌한 해답으로 들렸다.  
로봇에 대해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여타의 기계와 다르다는 점 때문이다. 자동차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것의 존재에 대한 정의로 고민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은 인간과 상호작용을 하고, 인간과 감정의 교류를 하며,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하나의 새로운 종으로서 우리 사회에 편입될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는 로봇시대가 도래할수록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로봇과 대중의 벽 허문 로보티즈 
사실, 로보캅이라는 영화를 본 뒤 진행되는 토론회이다 보니 영화와 연관된 로봇의 한 단면에 편중되어 토론이 진행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토론은 로봇의 윤리에서부터 융합, 로봇에 대한 정의, 로봇산업의 현실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부분을 건드렸다. 

다만 로봇과 관련된 다수의 화두에 대해, 각자가 생각하는 로봇의 이미지가 제각각이었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혹여 기회가 된다면, 또 한 번 이처럼 다양한 인사들이 모여 “로봇은 이렇고, 저렇고”가 아닌 “이 로봇은 이렇고, 저 로봇은 저렇고”라는 식의 세분화된 토론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더불어 로봇과 대중의 벽을 더욱 허물어준 로보티즈에 감사하며, 제2, 제3의 로보티즈가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필자 - 월간 로봇기술 정대상 기자(press2@engnews.co.kr)

※ 출처 : EngNews (산업포탈 여기에) - 로봇에 대한 논의, 이제는 전문적일 필요가 있다